[경향신문]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지난 5일 경향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황혼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몸짓으로 형상화하고 있다.정지윤 기자동물이 좋아 진학한 수의학과 자퇴 동성중 동창 김성구와 극단 입단 1972년 첫 창작마임 ‘첫야행’ 공연그가 걷는 길이 ‘한국 마임의 역사’가 됐다. 1972년 10월 한국마임연구소가 심우성·김세중(무세중) 등의 주도로 문을 열었다. 당시 을지로 입구에 있던 에저또 소극장에서 연구소의 발족을 알리는 세미나가 열렸고 공연 한 편이 올라갔다. 한국 마임의 개막을 알린 <첫야행>이었다. 처음으로 도둑질에 나선 ‘어설픈 도둑’ 이야기를 몸으로 표현했던 배우가 바로 유진규였다. 비록 25분짜리였지만 국내에 창작 마임의 등장을 선언한 작품이었다.몸짓광대 유진규가 ‘마임인생 50년’을 맞았다. 더불어 올해 일흔 살, 드디어 노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쌩쌩하다. 지난 5일 경향신문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날씬한 몸매에 비니 스타일의 검은 털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었다. 걸음걸이도 성큼성큼 했다. “만으로 셈하면 올해가 49주년에 69세 아니냐?”고 했으나, “내 셈법으로는 50년이 맞고 나는 올해 일흔 살”이라고 했다. 시작부터 ‘하나’로 셈하는 게 옳다는 뜻이다. 마임인생 50년을 맞은 유진규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1952년 종로구 인의동에서 태어난 아이는 심히 내성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국어책을 읽으라 하자, “얼굴이 빨개져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슬슬 삐뚤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대광고등학교에 진학해 밴드부에 가입한 이유도 “밴드부가 가장 건들건들해서”였다. 3학년이 돼 악장을 맡았을 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한창이었고 “고대 형님들과 동대문까지 진출”했다. 서클룸에서 몰래 악기를 반출, 데모대 속에서 애국가를 연주했다.딱히 음악이 좋아 밴드부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배우를 꿈꾸지도 않았다. 당시 그가 꿈꿨던 것은 “아프리카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가는 것”이었다. 동물을 좋아하던 청년은 건국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학교 생활은 세렝게티를 향한 꿈과는 영 딴판이었다. 실망 끝에 야영 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무주구천동에서 한달쯤 지내다 돌아와 학교를 아예 그만뒀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어느 신문 문화면에서 극단 ‘에저또’에서 단원을 모집한다는 짧은 기사를 봤어요. 극단 이름이 특이해서 왠지 맘에 들었죠. 막연하게나마 연극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내 친구 김성구랑 그 극단에 들어갔어요.”‘친구 김성구’는 동성중학교 동창이다. 마임의 길을 함께, 때로는 따로 걸었다. 두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마임의 쌍벽이다. 유진규는 김성구에 대해 “중학교 때부터 ‘절친’, 긍정적인 경쟁자”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게 하는 거울 같은 존재죠. 그가 있어서 내가 있고, 그 반대도 아마 마찬가지일 겁니다.”앞서 언급한 <첫야행>으로 한국마임의 탄생을 알린 후, <무너지는 소리> <돼지들의 산책> <대사 없는 1막>을 줄줄이 공연하고 군대를 갔다. 그곳에서 또 ‘사고’를 쳤다.“군악대로 차출됐는데 선임들이 굉장히 심하게 괴롭히더라고요. 어느 날 무작정 부대 담을 넘었죠. 한겨울, 안개가 뿌연 새벽이었어요. 그렇게 한참 걸었는데, 어느 순간 안개가 싹 걷히더니 발밑으로 파란 새싹들이 무수히 돋아난 게 보였습니다. 제가 보리밭 한가운데 서 있었던 거죠. 그 새싹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부대로 다시 돌아갔어요. 하지만 나는 달라졌죠. 군복 단추 죄다 풀어헤친 채 군악대장(중령)을 ‘어이, 아저씨!’라고 불렀거든요.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 거죠. 그랬더니 병원에 보내더라고. 대전국군통합병원 정신과. 그때 만난 군의관이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어디서 뭐하다 왔냐고 물어서 자초지종을 얘기했죠. 난 군대에 맞지 않는다는 말도 했어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하, 당신이 추구하는 건 다다이즘이네!’ 그러더라고.(크게 웃음)”“예술은 혼자 할 때 가장 순수해” 독립예술가 선언 작품 ‘육체표현’ 뇌종양과 싸우며 만든 ‘빈손’움직이는 관객 시도한 ‘빨간방’ 올해 진주연극제 개막작까지…“무대에 섰을 때 살아있음을 느껴” 만 69세에도 인생작은 계속된다우여곡절 끝에 제대하고 다시 극장으로 갔다. 을지로 입구의 에저또 소극장은 없어지고 대신 ‘에저또 창고극장’(지금의 삼일로 창고극장)이 있었다. 1975년 12월 공연했던 <잔나비는 돌아오는가>는 정신병동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유진규는 정신과 의사를 연기했다. 직후에 극단 에저또를 나와 “독립예술가를 선언”했다. 이전엔 작가·연출가와 함께 일했지만, ‘독립예술가 유진규’는 1976년 4월 초연했던 <육체표현>부터 “모든 것을 혼자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자신의 지론을 강하게 피력했다. “예술은 철저히 개인적인 겁니다. 한 사람에게서 모든 게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술은 가장 순수하고 온전합니다.”<육체표현>은 그런 맥락에서 그에게 ‘인생작’이었다. 자신의 ‘50년 마임인생’에서 특별히 의미있는 작품으로 그는 <아름다운 사람>과 <빈손> <빨간방>을 추가했다. 1979년 12월 초연했던 <아름다운 사람>은 “독립예술가로서 내 작업의 총화”였다. 뇌종양과 투병하며 만들었던 <빈손>(1998년)은 “(서구와 다른) 나의 정체성, 나의 피에 관한 이야기”였다. 2009년 10월 첫선을 보였던 <빨간방>은 “공연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그때 교통사고로 9개월간 병원에 있었어요.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죠. ‘내가 퇴원해서 공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의사한테 물으면 ‘잘 모르겠다’는 답만 들었어요. 병원에서 많은 생각을 하다가 이 작품을 구상했죠. 그때까지 모든 공연에서 관객은 어두운 객석에 앉아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기만 했잖아요? 이 작품은 반대죠. 배우는 가만히 있고 관객이 움직여요. 인사아트센터에 수많은 거울을 설치했습니다. 관객들이 그 ‘거울숲’을 걷고 헤매면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그러다가 배우인 나에게 당도하는 거죠. 저는 와인이나 커피를 한잔 주면서 그렇게 찾아온 사람과 대화를 나눕니다. 어떤 사람은 와인을 더 마시려고 세 번이나 찾아오기도 했어요.”1989년 그의 주도로 창설된 한국마임페스티벌, 1995년 춘천국제마임축제로 명칭을 바꾸고 범위를 확장했던 이 페스티벌은 한국 마임의 총본산이었다. 세계 곳곳의 몸짓광대들이 해마다 5월이면 호반의 도시 춘천을 찾아와 한바탕 난장을 펼치고 돌아가곤 했다. ‘블랙리스트의 망령’이 활보하던 지난 정권 시절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각 장르의 후배들을 불러 모아 ‘주류 아닌 예술가들의 시국 퍼포먼스 옳’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내걸고 저항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광화문광장에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덩실덩실 춤을 췄고 때로는 땅바닥에서 몸부림쳤다. 광장의 텐트에서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70세 청년 유진규’는 “며칠 전에도 진주연극제 개막작으로 <모든 사람은 아프다>를 초연하고 왔다”며 “서울에서도 꼭 공연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와 촬영을 모두 마친 그는 “수선화 같은 아내”와 1981년부터 살고 있는 춘천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요즘 부쩍 무대에 섰을 때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껴요. 무대에서 생을 마감한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를 부르는) 무대가 점점 줄어드네. 나이 많다고 그러는 건가? 난 아직 청년인데 말이야. 나는 지금도 거리든 극장이든 그 어디에서든, 관객과 함께 몸으로 얘기하고 싶거든요.”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인터랙티브] 그 법들은 어떻게 문턱을 넘지 못했나▶ 경향신문 바로가기▶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