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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더듬는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생활 [오래 전 ‘이날’]

작성자
궁이동
작성일
20-08-07 15:50
조회
22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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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오래 전 ‘이날’]망각 더듬는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생활

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왼쪽에서 두 번째), 지청천 장군(왼쪽에서 세번째), 이승만 박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후란체스카 여사(오른쪽). 경향신문 자료사진.
60년 전 오늘 경향신문에는 ‘망각 더듬는 이박사 생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4·19 혁명에 의해 축출된 전 대통령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에는 ‘하와이어 돌아오지 않을 모양’, ‘푸 여사도 강아지 잊어버린 듯’ 등의 부제목이 달렸습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박사에게 해안별장을 제공한 월버트 최씨 부처는 이박사 부처가 친구들과 고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이젠 다시 고국에 돌아갈 의사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하와이에 왔을 당시 “어떻게 해서든지 돌아갈 생각이에요. 귀여운 강아지 세 마리가 기자리고 있는걸요”라고 말한 푸란체스카 부인도 이 늙은 내외를 따뜻한 ‘아로와’의 마음씨로 맞아준 하와이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마음잡은 모양이다. 허나 이박사를 맞이한 교포사회는 복잡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구로 쳐서 팔천에 불과한 교포사회건만 친과 반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사진=이박사 부처가 한거하는 월버트 최씨의 별장, 이 부근은 양어장을 매몰한 곳. 주위에는 수초가 우거졌고 집이라고는 이 별장을 합하여 세 채밖에 없다. 맑은 여울이어서 어린이들이 게잡이를 위해서 모여든다. 원내는 망명하는 비행기 안에서 찍은 이박사의 표정.

1960년 8월 6일 경향신문.
12년 간 장기집권했던 독재자 이승만은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자 하야했고, 같은해 5월 29일에는 김포공항을 통해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60년 전 오늘 경향신문의 기사는 그렇게 도망치듯 하와이로 떠난 독재자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경향신문은 이승만이 김포공항을 통해 망명했다는 사실을 단독 취재해 그날 특종으로 보도한 바 있습니다.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내던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의 하와이 망명 사실을 특종 보도한 1960년 5월29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사망한 지 55년이 지난 최근 이승만의 이름이 여러 언론 보도에 다시 등장한 것은 뜬금없는 ‘국부’와 ‘건국 대통령’ 논란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달 23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이 후보자의 ‘사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질문들을 한 것입니다. 미래통합당 박진 의원은 전대협 문건에 있는 ‘이승만 정권은 괴뢰정권’ 표현을 근거로 이 후보자에게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물었고, 이 후보자는 “국부는 김구 주석이 되는 게 더 마땅하다고 본다”고 답했습니다. 이 후보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는 주장에는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다”면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논란은 지난달 19일 이승만 사망 55주기 추모식에서 국가보훈처장이 한 추모사에 대해 일부 언론이 비판 보도를 하면서 촉발되기도 했습니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면서 이씨를 ‘이승만 박사’라고 호칭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이 이승만을 폄훼한 것이라고 보도한 것입니다. 박 처장은 지난달 28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어떠한 의도가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이 박사’, ‘이 박사님’이란 호칭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별 구분 없이 생각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박 처장은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 건국 대통령으로 인정하는가’라는 미래통합당 강민국 의원의 질의에는 “초대 대통령이라는 말씀에는 동의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강 의원의 “건국 대통령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나”라는 질의에는 “그 부분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개인이 아니라 보훈처장으로서 정책을 수행해나감에 있어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즉답을 피했습니다.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인 동시에 독재자였고, 부정선거와 많은 시민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주 4·3과 6·25 당시의 양민 학살은 물론 4·19 혁명 당시 독재에 항거하다가 사망한 이들에 대한 책임만으로도 이승만을 국부나 건국 대통령으로 선뜻 인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4·19 당시 이승만 정부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발포하면서 186명의 시민을 살해한 바 있습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없지만 과오가 너무나 크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2015년 8월 경북대 이정우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했던 ‘[시대의 창]광복은 언제 오려나’라는 글 가운데 이승만의 과오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요새 광복보다 건국을 중시하면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모시자고 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이승만은 역사를 왜곡시킨 치명적 잘못을 저질렀다. 이승만의 과오 세 가지를 들자면 첫째, 권력 장악에 눈이 멀어 남북 분단을 조장한 죄, 둘째,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국내 권력 기반을 만들어내기 위해 친일파를 살려주고 중용한 죄, 셋째, 왕처럼 군림하며 독재한 죄. 민족 반역자들이 처벌받기는커녕 요직을 독차지함으로써 신생 독립국 한국에서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했다. 광복인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흑백이 뒤바뀌고 사회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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